지조없는 공공성과 위기의 시대

엄밀히 말하자면 내 전공은 미디어 정책이 아니다. ‘공공미디어연구소’라는 미디어 관련 정책 분석과 대안을 연구하는 곳에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전문 분야는 아니다. 때론 나조차 주위에서 전공을 물어 올 때 선뜻 한두 개의 명사로 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일종의 ‘잡탕식’ 공부만을 해온 듯하다. 그러나 때론 이런 비전문성이 학계와 업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개념과 용어들을 전혀 엉뚱한(?) 관점에서 보게 해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가장 많이 쓰이고, 또 그만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공공성”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동일한 이름의 한 개념이 이렇게도 쓰이고 저렇게도 쓰인다는 건, 용어가 지조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실체가 모호한 그 용법 때문이기도 하다. KBS 수신료 인상안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의 한복판에도 이 공공성이 놓여있다. 한쪽에서는 김씨성을 가진 정권의 비서(KBS)가 무슨 낯으로 수신료를 올려 달라느냐 하고, 다른 쪽에서는 2009년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 여당측 위원장의 말처럼 “공익성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

나 역시 그런 대립 속에 서 있다면 비슷한 논리를 취했을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한 간담회에서 지금의 방송정책에 조금은 날이 선 언급을 던진 내게 돌아온 말이 있었다. “마음에 안든다고 무조건 비판만하시면 안되죠..” 맞다. 명색이 연구자인데 ‘쿨’하고 ‘과학적’으로 가야지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 공공성이란 개념도 내 맘대로 쓰지 말아야 하니, ‘먹물’의 근성을 발휘하여 다른 학자가 어떻게 말했는지 옮겨보자(조금은 미안하게도 이 분 역시 나처럼 미디어 정책이 전공은 아니신 분이다). 이탈리아의 빠올로 비르노(Paolo Virno)라는 학자는 공공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다양한 집단과 공동체들이 동시에 겪는 위험과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가장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지성에 의한 말하기/사고하기의 방식이자 그 장.”

많이 어렵다. 정책이 전공이 아닌 사람의 말을 옮겨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르노의 이런 정의는 공공성을 만고불편의 의미를 가진 개념이 아니라 사회 전체와 우리의 삶 모두가 도처에서 위험에 처해있는 요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쓴, 말 그대로 “시대 맞춤형” 정의이다. 생각해 보면 그럴 듯하다. “방송”이라는 그 평범한 단어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건만 그에 붙는 전통적 수식어인 공공/공영성은 왜 가만히 있어야 하나?

정치적이지도, 돈도 들지 않은 공공성

이런 공공성을 염두에 두면, 2008년 촛불시위 때부터 작년 연평도 사태, 그리고 최근의 구제역까지 실로 “다양한 집단과 공동체들이 동시에 겪는 위험과 공포”의 시대가 바로 지금 한국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공공성은? 국가니 시장이니 잠시 접고 이 정의를 따라보면 그러한 “공포와 위험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말과 사고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되겠다. 연평도 사태도 그랬지만, 구제역이야 말로 계급과 계층, 지역차별 없는 공통의 위기라 할만했다. 초기에야 예전처럼 서울 아닌 ‘지역’ 몇 군데에 있는 축산농가의 문제라고 여겨졌지만,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겨울 그 맘 때 쯤이면 한창이어야 할 지역축제가 모두 취소되고 유통망은 멈추면서 지역 경제는 폐허가 됐으며,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은 지역들 또한 끝을 모르고 치솟는 육류 값에 비명을 질러야 했다. 비단 사람만의 문제였을까, 300만 두가 넘는 생명들이 생매장을 당했고, 이제는 그 후유증이란 이름으로 환경 오염문제까지 우려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위기의 양상이야 말로 1997년 공황 때 계급과 계층을 막론하고 모두가 온 몸으로 겪은 위험과 공포가 지금까지 이어진 우리시대의 위기라 할만하다.

그러면 우리의 공영방송은 이 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사상초유의 방송시간을 G20에 할애하고, 국군장병 보온조끼 모금방송에 앞장선 KBS가 과연 이런 전면적인 위험과 공포로부터 탈출하려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듣기나 했었는지 의문이다. 하긴 KBS 뿐만이 아니다 공영방송 모두가 각자의 지역 네트워크 방송국이 있었음에도 구제역이 번져갈 때 심층취재 한편 내놓지 못했다. 정권의 국정철학을 구현하건, ‘좌파’를 척결하건 상관없다. 정치적 지향이 어떠하든 우리의 공영방송은 그런 위기와 공포를 절감한 것 같지도 않다. 언젠가 아렌트(H. Arendt)가 말했던 “타인의 고통에 눈을 감은 죄”에서 오늘 한국의 공영방송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한 번 더 묻고 싶다. 이러한 위험과 공포, 그리고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탈출법을 모색하는데 정치적 입장이 필요한가, 아니면 더 많은 수신료가 필요한가.

모든 것은 변해도 시청자는 변치 않는다?

나 역시 KBS가 수신료라는 안정된 재원을 갖고 상업재원에 의존하지 않은 자유로운 방송이 되길 바란다.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수신료가 한 푼도 인상되지 않은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 세월만큼이나 KBS를 포함한 공영방송사들과 학계에서도 공영/공공성을 이야기 할 때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 정권도 바뀌고,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시장의 경쟁구도도 바뀌었다. 그래서 공영방송 또한 정권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 글로벌 경쟁력 강화의 방향에 따라 분주히 움직여왔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시청자들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KBS가 말하는 공적 책무(accountability)의 항목들을 보면 난시청해소 및 수신서비스, EBS 송신지원 및 수신료 직접 지원, 연수시설 개방, 장애인을 위한 방송, 성금 모금, 기부프로그램, 복지재단, 그리고 시청자 위원회 정도가 포함되어 있다. 몇 개의 항목이 방송법의 개정에 따라 바뀌기는 했지만, KBS가 생각하는 공적 책무 혹은 시청자(이용자)에 대한 역할은 일종의 봉사활동이거나 “시혜적인 복지”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는 보호받아야 할 이용자, 장애인과 빈곤층과 같은 소외계층, 기술적 혜택(난시청 해소)을 받아야 할 오지 주민, 도덕적이고 올바른 미디어 이용을 배워야할 피교육자만이 등장할 뿐이다.

우리 시대의 공공성이 “공포와 위험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말과 사고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이미 이런 요구들은 2008년 촛불시위 때 충분히 확인됐다. 비르노의 표현대로 이러한 요구의 주체를 “다중(multitude)”이라 부른다면, 87년 6월 항쟁 때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과 지금의 ‘시청자’들은 분명히 다르다. 요구의 출발은 집권이나 정권교체와 같은 정치적 지향이라기보다 광우병, 구제역, 전쟁위기와 같은 공동체와 삶 전체에 닥친 위기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럼에도 KBS의 수신료 인상 주장에서 엿보이는 시청자는 여전히 수동적이고 보호받아야 할, 그래서 충분한 재원을 바탕으로 수혜를 받아야 할 복지 혜택의 대상일 뿐이다. 실로 오랫동안 동어반복에 가까울 만큼 언급되어 온 “수신료 인상이 선행되는 공공성 강화”란 이렇듯 한편에서는 수신료 재원과 시청률로 표상되고, 다른 편에서는 복지 수혜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수동적 “국민”이 전제되기에 가능한 주장이다. 연평도 사태로 온 국민의 전쟁의 위기에 처하고, 수많은 해고자들이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국민’의 생계문제까지 위협할 정도로 확대된 구제역 위기에서도 당당히 수신료만 인상되면 공공성을 강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결국 “그들만의 시청자”라는 허상이 변치 않기 때문에 가능한 뻔뻔함이다.

엄연히 대한민국 수도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의 곁에 있는 KBS가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공포와 위험을 깨닫지 못하며, 그러한 요구를 외치는 다중으로서의 시청자들을 보지 못하는 이상, 적어도 KBS의 공공성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미디어 정책의 ‘비전문가’인 내게 지금의 KBS 시청료를 한 푼도 올려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설령 시청료를 6,000원까지 올린다 해도 여전히 우리/시청자들은 당신들에게 변치 않는 존재로 남아 있지 않겠는가. “공영방송을 위해 더 많은 수신료를 내주는 국민”들은 잠시 이며, 여전히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거래 당사자, 혹은 “혜택에 굶주린 이들”로 말이다. 두고 보길, 우리는 만만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