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원 : 최근 들어 북·일 간에 정상회담 추진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작년 3월과 5월 동남아에서 두 차례 북·일 접촉이 있은 뒤, 5월 27일 기시다 총리는 ‘조건 없는 정상회담’을 처음 제안했다. 그는 9월 20일 유엔총회에서도 이를 되풀이했고, 금년 2월 9일 “대담하게 현상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며 거듭 방북 의사를 드러냈다. 2월 25일 납치피해자 가족모임은 조건부로 대북제재 해제에 동의함으로써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investing : 북한도 일본의 정상회담 제안에 비공식 접촉에서 긍정적 반응을 보인 데 이어, 금년 1월 5일 김정은 위원장은 정초에 발생한 일본지진에 대해 위문 전문을 보내면서 기시다 총리를 ‘각하’라고 호칭했다. 또한 기시다 총리의 거듭된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2월 15일 김여정 당 부부장은 “과거 속박에서 대담하게 벗어날 필요”를 언급하며 “일본이 결단 내린다면 수상이 평양을 방문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공개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북·일 교섭 잔혹사

하지만 북·일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북한과 일본은 1990년 9월 가네마루(자민당 간사장), 다나베(사회당 부위원장)의 방북을계기로 1991년부터 2002년 10월까지 총 12차례 수교회담을 가졌다. 2002년 9월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가 정상회담을 갖고 ‘평양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북한의 납북 사실 시인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북·일교섭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다가 아베 2차 내각 때인 2014년 5월 스톡홀름에서 ‘5.29 합의’가 채택되었다가 또다시 중단된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북·일 관계의 최대 걸림돌은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보다도 일본인 납북문제이다. 한국인에 대한 학살과 강제동원, 성노예화 등 과거 제국주의 일본의 수많은 만행을 보아온 우리로서는 일본인들이 납북문제에 그렇게 흥분하는 게 바로 이해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정부뿐 아니라 다수 일본인들이 이 문제에 공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로 받아들이고 대할 수밖에 없다.

일본인 납치문제와 관련, 북한으로선 일본에 기만당했다는 인식이 강하다. 김정일 위원장은 고미즈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인 납치문제를 인정하면 북·일 수교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당시 일본정부는 공식적으로 11명의 납북의심자를 기록해 놓고 있었는데, 북한이 납북자가 13명(생존 5명, 사망 8명)이라고 밝힌 것이다. 하지만 일본정부가 약속을 여러 차례 위반하면서 북·일 수교에 대한 기대가 무산되자 대일 불신이 깊어졌다.

첫째는 2002년 10월 북한은 ‘평양선언’에 따라 생존 납북자 5인과 가족들을 ‘일시 방문’이라는 조건으로 귀국을 허용했지만 일본정부는 당초 약속을 어기고 납북 일본인 5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건이다. 일본정부는 오히려 납북자가 총 17명이라고 주장하며, 이른바 ‘아베 3원칙’을 내세워 △귀국한 5명을 제외한 납북자 12명 전원의 귀국△생사불명 피해자에 대한 진상규명△실행범의 신병인도 등을 요구하고 있다.

둘째는 2008년 요코다 메구미 유골과 관련한 것으로, 전달 방법에 대한 약속 불이행과 데이쿄 대학의 가짜 판별 두 가지이다. 당초 일본은 메구미의 유골을 유가족에게 직접 전달하고 공개하지 않기로 북한과 각서까지 썼으나, 이를 일본경찰청에 넘기고 공개하는 등 약속을 위반했다. 그 뒤 일본경찰청은 데이쿄대학 의료진의 조사 결과라며 감정서도 공개하지도 않은 채 ‘가짜 유골’이라고 발표해 버렸다. 이에 북한외무성은 대변인 담화를 통해 감정서 공개와 재감정을 요구하며 반박했지만, 일본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셋째는 ‘5.29 스톡홀름 합의’(2014)에 따라 북한당국이 북한지역에서 사망한 일본인의 유골과 묘지, 잔류자·납북자·행방불명자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조사보고서에 ‘모든 납북자가 살아있다’는 아베 3원칙에 어긋나는 내용이 담기자, 일본정부는 아예 북한측 보고서의 접수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언론에는 북한이 제출하지 않아 ‘5.29합의’가 지켜지지 못한 것처럼 호도해 결렬 책임을 북한에 떠넘겼다.

일본이 북·일 교섭에 나선 이유

이번 북·일 교섭의 논의 경과를 보면, 일본 측이 먼저 제안하고 북한 측이 이에 호응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군사 재무장을 추진하는 일본이 국제사회에 평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특유의 이중 플레이로 볼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국내 정치적 사정과 외교 전략에 따른 고려가 깔려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국내 정치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오는 9월 자민당 총재선거를 앞두고 2012년 자민당 집권 이래 최저치인 20%대의 낮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기시다 총리의 정치적 승부수이다. 기시다 총리는 오는 4월 미·일 정상회담에 이어 상반기 중에 북·일 정상회담을 개최함으로써 지지율 반등을 꾀하고 있다. 실제로 고미즈미(小泉) 총리는 2차 북·일 정상회담 직후 지지율이 54%로 급등했던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일본 외교의 오랜 숙제를 풀기 위한 목적도 담겨 있다. 일본은 해결해야 할 전후외교의 총결산 과제로 두 가지를 꼽고 있다. 하나는 쿠릴 4개 섬 분쟁의 미해결로 미뤄지고 있는 러·일 평화조약의 체결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북핵, 납치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는 북·일 국교 정상화이다. 한국과 중국, 러시아는 물론 미국까지도 북한과 정상회담을 한 마당에 일본만 외톨이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북한의 핵·미사일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한 북·일 핫라인 구축의 필요성 때문이다. 일본은 ‘적기지반격능력 보유’로 방위전략을 공세적으로 전환하고 국방예산도 5년 내 국내총생산(GDP) 2%를 목표로 내세우는 등 재무장에 시동을 걸었다. 또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정상화하고 한·미·일 미사일 경보정보 공유체계도 정비했다. 이제 남은 것은 대북 핫라인 구축을 통한 북한의 평화적 관리이다. 실제로 북·일 정상회담 얘기가 나온 뒤, 북한은 작년 5월과 8월 군사정찰위성 발사 때 이례적으로 한국을 빼고 일본에만 해상위험구역을 통보한 바 있다.

끝으로, 일본의 이른바 한반도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일본은 대국외교에 시동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등 한반도 문제 논의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에 들어와 남북관계 적대화, 북·미 대화 단절의 상황이 계속되자 지금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호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은 북한 카드를 통해 윤석열 정부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도 북·일 교섭 지지, 윤석열 정부는?

매튜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북·일 정상회담에 대해 역내 안정에 기여한다면 환영할 일이라고 밝혔다. 사브리나 싱 국방부 부대변인도 “우리는 역내 안정을 원한다”며 “북·일 대화가 그러한 결과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선임국장도 “미국이나 파트너들이 북한과의 관여를 원하고, 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지원하고 협력하며 협의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러한 미국 측 반응이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급하다. 미국과의 충분한 사전조율 없이 일본이 단독으로 추진한1990~91년, 2002~04년 두 차례에 걸친 북·일 관계 정상화 노력이 사실상 미국의 반대와 보수강경파의 방해에 부딪혀 좌절된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미국의 필요성과 일본 측 전략이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북·미 대화채널이 끊긴 상태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누군가 나설 필요가 존재한다. 기존의 우발적 군사충돌 방지장치인 ‘9.19 남북군사합의’마저 걷어차 버린 윤석열 정부에게 이러한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부실한 물가대책과 당내 스캔들로 공멸의 위기에 처한 자민당보수강경파들로서도 상황 돌파를 위한 기시다의 방북을 마냥 반대할 수만 없는 노릇이다.

지난해 캠프 데이비드 3국 정상회담 등을 통해 한·미·일 공조가 만들어진 가운데, 일본이 미국과 한국의 입장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북·일 정상회담을 밀어붙이기에는 외교적 부담이 너무 크다. 그런데 지금 국제정세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작년 4월 중국, 금년 1월 몽골에 이어 지금 영국, 스웨덴이 평양 주재 공관을 재가동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미국이 북·일 대화에 지지 입장을 밝혔으니 남은 것은 한국의 태도이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지난 16일 “북한이 서울을 거치지 않고 워싱턴과 도쿄로 절대 갈 수 없다”며 강경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25일에는 “한반도 평화와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대화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꼬리를 내렸다. 이는 남북관계의 단절 속에서 한반도 문제마저 일본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심한 윤석열 외교의 고백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제라도 ‘자유의 북진’이라는 철 지난 이념 타령을 중단하고 현실적인 외교 대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